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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길, 美路가 되다

서울신문

서촌-북촌-평창동 잇는 가교
임대료·땅값도 비교적 저렴
화랑들 속속 새 보금자리 마련
市 '미술관도시 사업' 결실 땐
서울 대표하는 예술벨트 기대

자하문로 주변 미술관련 시설


돼지요리 전문 식당 2층의 빼꼼 열린 창문 사이로 뻗어나온 낚싯대 두께의 나무막대가 1층 지붕을 지나 바닥까지 내리 닿나 싶더니 방향을 틀어 건물 안으로 향했다. 고동색 선과 연갈색 점이 반복되는 이 나무막대는 난간처럼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최근 서초구 방배동에서 경복궁역 근처인 종로구 자하문로 쪽으로 이전한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이다. 밖에서부터 시선을 끌었던 나무막대는 작가 듀오 로와정의 설치작품 ‘지독한 선(Dashed Line)’이다. 특정한 공간을 소재이자 매개로 삼아 공적 환경과 사적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전시장 벽면과 천장을 비롯해 사무공간까지 침투하며 관객의 눈과 몸을 움직이게 한다.

윌링앤딜링은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 사무국장을 거쳐 대림미술관 등에서 일한 김인선 큐레이터가 지난 2012년 개관한 곳으로, 이태원 경리단길과 방배동 카페골목을 거쳐 이달 중순 자하문로 방면 서촌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대표는 “규모는 작아도 효과적, 적극적으로 미술을 소개할 곳을 물색하던 중 상업화랑들이 포진한 북촌보다는 대안적 공간 위주의 서촌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이전 이유를 설명했다.

◇자하문로 따라 예술로(路)=북촌·서촌과 평창동을 연결하는 자하문로 주변에 ‘아트타운’ 형성의 분위기가 활발하다. 경복궁역 부근 유명 삼계탕집 뒷골목에는 표미선 전 화랑협회장의 표갤러리가 지난 5월 이전, 재개관했다. 1981년 처음 문 연 표갤러리는 신사동 가로수길 조성 초기에 ‘화랑거리’를 일군 주역이었고 청담동,이태원에 이어 서촌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 상명대 앞쪽에는 ‘갤러리빌딩’이 들어섰다. 최웅철 화랑협회 회장이 32년의 강남 논현동 생활을 정리하고 4층 규모 빌딩으로 웅갤러리를 이전했다. 건물 지하 1층에는 본화랑이 둥지를 틀었다. 1층에는 프랑스계 화랑이자 ‘스트리트 아트’로 유명한 브루지에 히가이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그 옆에는 갤러리 아트아리가 현재 입점을 위한 내부공사를 하는 중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미술품 거래업체도 들어올 예정이다. 자하문로를 사이에 두고 길 건너에는 에이엔에이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인근 홍지동 세검정파출소 옆에는 김달진미술연구소가 신규 전시공간으로 ‘세검정북갤러리’를 열었다.

이 같은 움직임의 1차 요인은 부동산이다. 경복궁역 사거리에서 시작되는 자하문로가 관통하는 서촌지역이 ‘떴다’고는 하지만 북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임대료와 지가가 낮은 편이다. 권리금 부담이 큰 요식업종과 달리 갤러리라면 작지만 알찬 공간을 찾기에 유리하다. 부암동 쪽도 북촌·서촌이나 평창동에 비해 건물값이 저렴하다. 그렇게 자리 잡은 화랑과 대안공간이 성격별로 무리를 짓는 경향을 보여 집적효과를 기대하게 한다.

부암동과 홍지동을 아우르는 이 지역은 번화가는 아니지만 미술 인프라가 탄탄하다. 석파정을 품은 서울미술관과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를 기리는 환기미술관이 대표적이다. 환기미술관 인근에는 독립큐레이터였던 이승민 씨가 지난해 말 문 연 에이라운지(A-Lounge)와 라틴미술 전문 기획자인 안진옥 대표의 갤러리 반디트라소가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유일의 미술자료 전문기관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과 유금와당박물관, 자하미술관, 대안공간인 아트스페이스 풀도 가깝다.

자하문터널 남쪽의 서촌에는 조선 시대부터 중인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 효자동의 사진전문갤러리 류가헌을 지나면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주변으로 청전 이상범 옛집부터 천경자 집터 등이 몰려 있다. 1세대 대안공간인 사루비아다방이 있고 통인동 쪽은 시청각과 갤러리룩스, 통의동 쪽엔 대림미술관·아름지기를 비롯해 통의동 보안여관과 갤러리팩토리 등 대안적 성격의 미술공간이 자리 잡았다. 터줏대감 진화랑과 갤러리시몬·아트사이드·리안갤러리·인디프레스갤러리 등 실력파 화랑이 주변을 에워쌌다.

◇확장성 있는 예술특구= 자하문로를 따라 예술 관련 시설들이 모여든 것은 인사동과 북촌에서 시작해, 서촌을 지나 평창동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예술벨트의 형성을 의미한다. 북촌 삼청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중심으로 금호미술관과 국제·현대·학고재·아라리오 등의 대형화랑이 밀집해 명실상부 ‘미술시장 1번지’로 꼽힌다. 몇 년 사이 페로탱, 리만머핀 등 외국계 화랑이 들어왔고 바라캇 갤러리는 현대미술에 초점 맞춘 신관을 추가로 열었다. 여기서 도보로 10분이면 자하문로 남쪽인 서촌에 닿는다.

자하문로 북쪽은 미술관·갤러리가 밀집한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국내 제1호 등록미술관인 토탈미술관과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을 기리는 김종영미술관,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관통하는 화정박물관 등이 명소다. 국내 최대 미술품경매회사인 서울옥션 본사와 가나아트갤러리를 필두로 지난 2001년부터 평창동에 자리 잡은 갤러리세줄을 비롯해 키미아트·갤러리아트유저 등이 있고 최근에는 수에뇨339가 개관했다. 강남에 있던 갤러리2와 북촌에서 운영되던 누크갤러리가 지난해 평창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목할 것은 서울시가 ‘박물관·미술관도시 서울’ 사업에 따라 조성하는 연면적 5,101㎡ 규모의 ‘평창동 미술문화복합공간’(가칭)이다. 계획대로 오는 2021년 말 개관하면 인근 미술 관련 공간들의 시너지가 예상된다. 신세계그룹이 소유한 평창동 대로변 1만2,817㎡의 부지를 두고 미술계가 ‘미술관 건립’을 기대하는 것도 이 같은 복합적 상황 때문이다. 신세계는 지난 2010년 경매에 나온 이 땅을 매입했지만 현재는 나대지 상태이고 신세계건설이 펜스로 내부를 가려뒀다. 신세계는 지난 1963년 백화점 출범과 함께 신세계화랑을 운영했고 신세계미술관·신세계갤러리가 1970~90년대에 보여준 활약상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와 궤를 같이한다. 부암동 쪽의 경우 학고재갤러리가 신관 건립을 예정하고 부지를 확보했으나 금융위기 등 경기악화로 신축을 중단한 바 있다.

미술평론가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뉴욕의 소호와 첼시 등의 사례에서 보듯 예술공간이 포화상태에서 돌파구를 찾아 옮겨 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미술 시장 전반이 침체인 상황에도 재도약을 노리는 화랑들을 식당에 비유하자면 메뉴확대까지 고심해 다양하고 참신한 작가들을 선보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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